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고트 왕국 (문단 편집) ==== 고트 전쟁과 트라키아 정착 ==== 모이시아 남부와 마케도니아 일부 지역에 정착한 '''[[프리티게른]]''' 휘하 75,000 가량의 고트인들은 부패한 관료였던 모이시아 총독 루피키누스와 트라키아 총독 막시무스 등의 핍박을 받았다. 그들은 발렌스 황제가 고트족을 지원하기 위해 보낸 식량과 재물을 착복했고, 무거운 과세를 매기고 이를 갚지 못한 가정에 쳐들어와서 고트인 여성과 어린이들을 노예로 팔아치웠다. 이에 반감을 품은 고트족 족장들은 황제에 호소하고자 했다. 발렌스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자신들을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 본 루피키누스와 막시무스는 연회를 가장하여 고트족 지도자들을 초대한 뒤 습격했다. [[알라비부스]] 등 일부 지도자들은 현장에서 살해되었지만, 프리티게른은 가까스로 빠져나온 뒤 동족들을 설득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프리티게른은 5천 남짓한 군사로 1만에 달하는 루피키누스의 로마군을 상대로 마르키아노폴리스 전투에서 대파하고 루피키누스를 척살했다. 이때 동방 로마군 주력은 페르시아 원정을 준비하기 위해 동부 국경에 집중 배치되어 있던 터라 고트족을 막을 여력이 없었고, 고트족은 2년 동안 발칸 전역을 휘저으며 약탈과 방화를 일삼았다. 상황이 이렇듯 악화되자, 발렌스는 서방의 황제이자 자신의 조카인 [[그라티아누스]]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그라티아누스는 자신이 직접 출정하겠다고 약속했지만 때마침 게르만족이 라인강 일대를 대거 도하했기 때문에 이들과 맞서 싸워야 해서 당분간 떠나지 못하고 프랑크족 출신의 부하 프리게리두스, 리코메르 등의 장군들이 우선 동방으로 파견되었다. 서방 지원군과 합세한 발칸 주둔 로마군은 아드 살리스 전투에서 동방의 보병장관 트라야누스와 서방 로마군 장군 리코메르 등의 지휘를 받으며 고트족과 접전을 벌였다. 암미아누스에 따르면, 양쪽 모두 피해가 막심했고 승부는 나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고트족의 기세는 잠시 주춤했고, 발렌스는 여세를 몰아 시리아 일대의 정예부대를 이끌고 안티오키아를 떠나 378년 5월 30일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했다. 378년 7월, 발렌스는 서방 로마군 소속 이탈리아 군대를 지휘한 세바스티아누스 장군을 선발대로 파견해 트라키아 주둔군을 재편성하게 했다. 세바스티아누스는 트라키아군을 재편성하고 2천 규모의 기병대를 이끌며 고트족을 습격해 하드리아노폴리스로 접근하던 고트족을 축출했다. 한편, 그라티아누스는 서방 로마군의 정예부대를 판노니아 일대로 진출시키다가 라인강 일대에 있던 알레만니족이 침공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황급히 부대를 소환하여 아르겐타리아 근교에서 알레만니족을 격파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그라티아누스의 합류가 늦어졌고, 발렌스는 적의 규모를 과소평가하여 자신이 단독으로 고트족과 맞붙기로 결심했다. 이리하여 벌어진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로마군은 처참한 패배를 당하고 발렌스는 주요 지휘관들과 함께 전사했다. 그라티아누스는 뒤늦게 발칸반도로 군대를 이동했으나 이미 상황은 악화될 대로 악화되었다. 다뉴브 강 남부 일대는 고트족 무리들에게 파괴되었고 로마의 권위와 군사적 위신은 땅바닥에 떨어졌다. 게다가 그가 갈리아를 떠난 직후 게르만 종족들이 또다시 갈리아 침략을 계획하고 있다는 급보가 전해졌다. 이에 그라티아누스는 379년 1월 19일 [[테오도시우스 1세]]를 동료 황제로 삼아 제국 동방을 맡겼다. 테오도시우스는 고트족과 일전을 벌여 미친듯이 날뛰던 그들을 어느정도 저지했다. 381년 1월, 트란실바니아에서 조용히 지내던 [[아타나리크]]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갑작스럽게 방문했다. 6세기 동로마 제국 역사가 [[요르다네스]]에 따르면, 그는 테오도시우스와 평화를 협상하면서 자신을 따르는 고트족이 로마를 위해 싸워줄 테니 정착시켜달라고 요청하러 찾아왔다고 한다. [[파울루스 오로시우스]]와 [[조시무스]] 역시 이에 동의한다. 반면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에 따르면, 그는 동족들에 의해 추방되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망명했다고 한다. 테미스티우스 역시 그를 난민이자 탄원자로 묘사했다. 테오도시우스는 아타나리크를 환영식에 초대해 융숭한 대접을 했다. 아타나리크는 2주 후 사망했고, 테오도시우스는 죽은 왕을 위한 성대한 장례식을 치르게 했다. 그의 무덤은 무척 화려했으며 고트족의 방식으로 지어졌기에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이렇듯 자기들의 전 왕에게 융숭한 대접을 한 것에 감명을 받았는지, 서고트족은 382년 테오도시우스 1세와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그들은 모이시아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갖추고 보조금을 지원받는 대가로 로마군에 보조병을 지원하기로 했다. 이후 로마군에 고트족 출신 장군들이 대거 기용되어 테오도시우스 1세의 지휘하에 맹활약했다. 그 중 한 명이 바로 [[알라리크]]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